
△ 월간친환경 이경민 편집국장
기후변화와 세계 공급망 불안정이 이어지면서 ‘식량 안보’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는 밀과 콩 같은 전략작물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2020년 ‘밀 산업 육성법’을 제정하고, 2025년까지 밀 자급률을 5%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이 목표는 이미 멀어진 약속이 되어버렸다. 자급률은 2% 남짓에 머물고, 생산량은 목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전국 곳곳에 쌓여 있는 6만 톤의 밀 재고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1만 톤 수준이던 재고가 여섯 배로 불어났고, 생산한 밀의 상당수가 팔리지 못한 채 창고에 머물러 있다. 농가들은 제값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지쳐 재배를 포기하고 있고, 밀밭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같은 악순환은 단순히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구조의 불균형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생산 기반을 확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소비와 유통의 길을 열지 못했다. 국산밀 산업은 대부분 영세한 중소 식품업체가 이끌고 있다. 대형 유통망에 접근하기 어려운 데다, 제분·가공 시설이 지역마다 흩어져 있어 품질 표준화도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재고만 쌓이는 구조가 굳어졌다.
정책의 방향이 한쪽으로 쏠린 것도 문제다. 정부가 최근 몇 년간 ‘가루쌀’ 육성에 집중하면서 국산밀은 사실상 정책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제품화 패키지 지원사업’에서 가루쌀은 자부담 비율이 20%였지만, 국산밀은 50%에 달했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예산 규모도 가루쌀이 48억 원, 국산밀이 28억 원으로 차이가 컸다. 그 결과 농심, CJ, 오뚜기 등 대기업은 가루쌀 사업으로 빠르게 시장을 확장한 반면, 국산밀은 영세기업 중심의 좁은 유통망 속에 갇혀 경쟁력을 잃어갔다. 정책 자원이 한쪽으로 쏠리며 국산밀 산업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제는 단기적인 재고 처리보다, 소비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할 때다. 정부는 계획된 2만 3천 톤의 비축 물량 외에 긴급 수매를 확대해 농가의 부담을 덜고, 장기 보관이 어려운 일부 물량은 사료나 비료용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산밀을 실질적으로 ‘쓸 곳’을 만드는 일이다. 공공 급식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현재 학교와 군 급식에서 국산밀 사용률은 3%에 불과하다. 이를 단계적으로 늘리고, ‘국산밀 식단의 날’ 같은 제도를 도입한다면 소비 확대와 인식 개선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대형 식품기업의 참여도 필수적이다. SPC삼립과 아이쿱생협이 국산밀 사용 협약을 맺은 사례처럼, 정부가 가공비 지원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면 기업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 있다. 대기업은 유통과 마케팅을, 중소기업은 특화 가공을 맡는 상생 구조를 만들어야 국산 밀 산업이 지속 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다.
이제 곧 마련될 제2차 밀산업 육성 기본계획(2026~2030)은 이런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과거처럼 생산 확대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소비 중심의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역별 공동 제분시설과 물류 인프라를 확충하고, 품질 중심의 계약재배를 확대해야 한다. 국산밀 자조금 조성을 통해 민간 주도의 수급 조절과 소비 촉진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국산밀의 위기는 단순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 주권의 위기다. 창고에 쌓인 6만 톤의 밀은 단순한 재고가 아니라, 우리 식탁이 얼마나 불안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다. 정부가 정책의 균형을 바로 세우고, 국민이 국산 식재료의 가치를 다시 돌아볼 때, 비로소 우리 땅에서 자란 밀로 만든 빵이 다시 우리의 일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잊혀진 밀밭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을 때다.
네니아 웹진 2025년 11월